2016년 2월 20일 토요일

1938年 農業朝鮮 特派員 韓長庚

南朝鮮巡訪
1938年 農業朝鮮 特派員 韓長庚
 
第一信 (十月一日)
昨日 大邱支局에 到着하엿습니다 支局員들은 相當히 活動하는 便입니다 昨日午後에 市外 十五里를 나가서 米國輸出向 莞草「슬립퍼」 生産하는 鮮光副業組合을 보앗습니다 組合員 三千餘戶, 年産二十萬圓이오, 그 組織과 分業과 組合員의 生活指導에 對하야 獨特한 方法을 取하고 잇는데 배울만한 點이 적지 아니합니다 同組合 生産品인 莞草「슬립퍼」 二足을 別封으로 送呈합니다 今日은 慶山으로 갑니다
 
第二信 (十月五日)
「押梁面 土地는 押梁面民에게로」
昨夕에 釜山에 到着하엿읍니다
慶北에서 가장 優秀하다는 慶山郡 押梁面을 보앗는데 그 更生成績은 亦是 다른 更生部落과 같이 形式만은 잘 整頓되엿습니다 다만 特異한 일은 面長의 發案으로 「押梁面土地는 押梁面民에게로」라는 標語下에 土地買收資金을 造成中인데 總百萬圓 豫算에 今日까지 貯蓄된 것이 三萬圓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보다도 押梁全面 自作農創定案을 進行하는 것이 어떨가하는 意見과 全國自作農創定案에 對한 이약이를 햐여주엇습니다
 
第三信 (十月六日)
今六日에 金海에 到着하엿습니다 그 間 讀者들도 만나 보앗습니다 讀者들의 感想을 들어보면
一. 現在에 行하고잇는 行事에 對하야 自己들은 식히는대로 할뿐이고 그 內容을 자세히 아지못하니 그 行事의 解說을 하여줄것
例하면 防空演習이란 무엇인가
報國貯金이란 무엇인가
皮,革,鐵,銅,毛,木棉等은 무슨까닭으로 使用을 制限하는가 等等
 
二. 朝鮮文을 쓸수잇는 文句는 朝鮮文으로쓰고 될수 잇는대로 漢字를 적게할것
例하면 價格低落 = 값이 떠러진다
陽乾 = 해볕에 말린다
奏效 = 효력이 난다
等입니다 그 外에 農事改良의 記事는 도로혀 郡에서나 面에서나 直接指導하는 便이 더나으니 그런 記事보다 副業에 對한 것과 農民으로서 반드시 알어야할 常識을 만히 실어달라고 합니다 例하면 요새이에 아무 物價는 무슨 까닭으로 올라간다던가 朝鮮牛는 어느곳으로 팔려간다던가 하는것을 이야기 體로 써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感想은 自己들이 아지못해서 갑갑한것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今後부터는 이 讀者들의 感想을 만히 叅考하여야 되겟습니다 그러고 비록 知識階級이라도 意外로 前記한 常識에 어두운 것이라고 합니다 前記常識에 對하야 正確하게 趣味잇게 解說하면 朝鮮農村에는 「農業朝鮮」의 獨舞臺가 세워지겟다고 합니다 그런데 常識一題目에 對하야 文量은 冊으로 一頁도 조코 二三頁도 조흘것입니다 金海에서 農村을 도라보고 馬山으로 가겟습니다
 
第四信 (十月七日)
南湖先生 自作農創定期待
今七日에 馬山을 向하야 떠납니다
讀者들도 만낫습니다 今日까지 巡廻한 地方에서는 南湖先生의 名聲이 藉藉합니다 自作農을 南鮮地方에도 創定한다는 所聞이 相當이 퍼저서 農民들은 그것을 期待하는 사람이 적지 안습니다 金海支局은 雜誌宣傳方法은 조흔데 收金이 좀 困難합니다 今日 農村更生部落을 나갑니다
 
第五信 (十月十一日)
馬山支局에서 十月號 二十部 注文한 것이 아직 未到着이라고 합니다 곳보내주시오 咸安支局은 잘 發展되여 갑니다 今日 咸安을보고 將次 晉州로 向發하겟습니다
 
第六信 (十月十四日)
牛洞里 更生農村
十月十日以後로 每日 비가오고 陰風이붑니다
今十四日에 統營에 왓습니다
晉州에 와서 支局을 보앗는데 今後가 有望합니다 晉州를 떠나서 全南으로 가는길에 慶南唯一의 優良部落이라고하는 固城銀月里를 보기 爲하야 固城方面으로 나려갓습니다 이 部落은 前 郡守 宋燦道氏 (只今 外事部 事務官)가 建設하고 그 功勞로서 昇進하엿다는 말이 잇습니다 固城을 떠나서 統營唯一의 棉作模範村울 보앗습니다 이 洞里는 牛洞里인데 當局에서는 主로 棉作村으로 宣傳하고 잇스나 정작 가서보니 내가 처음보는 全鮮唯一의 更生村입니다 六年前에 百餘號 部落全部가 小作人이고 極度로 疲弊하엿던것이 同年에는 棉作 自作農이 八十三戶 (六年前에는 九戶)에 達하는 驚異的 數字를 보이고 잇스며 每戶平均 棉田 自作地가 一千三百餘坪이 되야 棉麥의 二毛作을 하고잇스며 其他 自作農으로서 모든 條件이 具備하고 잇습니다 이 原稿는 十二月號에나 너케 되겟습니다 南海郡을 거처서 麗水로 가겟습니다
 
第七信 (十月二十一日)
南海島
지난 十七日에 南海島에 들어갓습니다 이곳은 自作農이 五割, 自作兼 小作農이 三割이라는 朝鮮無類의 自作農王國을 이루고 잇습니다 島民도 매우 勤勉하야 배울點이 만습니다
十九日에 麗水에와서 德陽支局에 들어갓는데 地方讀者의 人氣가 매우 좃습니다 여기도 純小作地帶인데 南鮮의 大地主高瀨農場과 百五十餘名 小作人과의 사이에 小作爭議가 이러나고 잇습니다 慶南地方에서 듯든바와 같이 이 地方도 南湖先生의 自作農創定區域이 自己地方에 오기를 기다리고 잇습니다
順天 金城里는 全南唯一의 更生部落이라 함으로 그곳을 갑니다
 
南朝鮮踏査記 (1938年)
農業朝鮮 本社特派員 韓長庚氏 通信 (抄)
第八信 (十月二十八日)
오늘이 十月二十八日입니다 지금 羅州平野의 한복판에 와서잇습니다 本寺를 出發한지도 벌써 한달이 되엿스니 歲月은 참으로 빠릅니다 이와 같은 만흔날짜를 소비하엿스되 원래 巡廻區域이 넓은지라 마음대로 보지못한것이 遺憾입니다 이제까지의 通信은 너무 簡略하엿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巡廻는 主로 徒步로서 農村을 다녓기 때문에 낮에는 時間이 업고 밤에는 路困이나서 다리가 압흐고 눈이 저절로 갑겨서 그냥 자버리게되니 通信한장 하기에도 餘裕가 업섯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퍼부어서 어듸로 나갈수도업고 하로의 閑暇가 생겻슴으로 이제까지 도라다니면서 보고드른 것을 좀 자서히 써보랴고합니다
 


1. 京釜線車中의 젊은 두 勞働者


南鮮巡廻를 떠나든 지난 九月二十九日이엿습니다 京釜線車를 타고가는데 저편에 얼골이 蒼白한 젊은 勞働者 두사람이 앉어 잇섯습니다 니히는 二十 二三勢식 되여보이고 慶尙道말 사투리를 쓰는데 그 이약이하는 말을 드러보면 멀리 北鮮地方으로부터 오는 모양이엿습니다 나는 말동무도 업는 車中에서 좀 심심푸리라도 하기 爲하야 그들의 곁에가서 앉으니 한 靑年은 왼손가락 세개가 업서진것이 보입니다 그 靑年은 慶南咸陽 사람인데 남의집 머섬을 살다가 勞働者로 뽑혀서 咸北 어느 工事場에서 일을하는데 天井의 돌이 떠러지는 바람에 손가락 세개를 일허버리고 二個月이나 治療하다가 故鄕으로 도라오는 길이오 다른 한 靑年은 慶南密陽 사람으로서 亦是 勞働者로 뽑혀서 咸北으로 갓는데 정작 가서보니 工事請負業者들의 하는 行動이 처음 이약이하던 條件과는 판판히 틀려서 勞働時間이 길고 賃金이 적고 밥값이 빗사고하야 도저히 견딜수가 업스나 工事場에서는 勞働者가 마음대로 가는것을 嚴重히 監視함으로 逃亡하는者가 續出하고 自己도 한 간죠(賃金支拂)의 돈을 찾지못하고 겨우 車費를 만들어가지고 밤에 逃亡하여 오는 길인데 어제저녁과 오늘아침에는 호떡 한개를 먹엇다고합니다 나는 빵떡 몇개를 사서 그들과 함께먹으면서 그들의 感想을 무럿습니다 그들의 말에 依하면 勞働者를 斡旋한 郡面當局에서 間或 現地에 出張하야 請負業者들의 行動을 監視하는때는 勞働者에 對한 待遇가 조곰 조와지지만 그 監視人이 도라가면 또다시 낫부게되여 버리니 工事場에는 어느때던지 郡面當局의 監視人이 常住하엿스면 조켓다고 합니다 이런이약이 저런이약이를 하는동안에 咸陽靑年은 全羅線을 타기 爲하야 大田에서 나리고 나는 金泉에서 咸陽靑年과 作別하고 내렷습니다 비록 몇時間안되는 동안의 交際이엿지만 서로 갈릴때에는 그들이 自己身勢를 한탄함민지 퍽 섭섭해하는 氣色이 보엿습니다
 
莞草加工品
十月三十日에는 大邱에 들려서 잠간쉬고 達城郡 壽城面 聖堂洞.에잇는 鮮光副業組合을 찾엇습니다 이 組合은 現組合長 徐萬達氏가 同志數人과 함께 創設한 것인데 지금 事業은 莞草製品, 홈스빵(羊毛로서 洋服감,周衣깜을 짜는것임) 파나마帽子, 헤찌마 加工等이데 그 中에서도 가장 主要한것은 왕골스립바 입니다 스립바는 年産額이 約二十萬圓에 達하고 主로 內地貿易商의 손을 거쳐서 米國, 滿洲, 濠洲, 南洋, 印度 及 歐洲各國에 輸出되고 原料는 達城, 漆谷, 高靈等 組合區域에서 生産하는것 以外에 멀리 金泉, 軍威, 居昌, 陜川, 報恩, 全州等地에 出張員을 보내여 買入하고 現在 組合員 戶數는 三千餘戶오 從業人員數가 一萬人以上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組合員은 一年을 通하야 늘 作業할수잇고 組合員 一人當 每月收入은 最高 九十餘圓 最低 八九圓 平均 十六圓이라고하니 農家의 副業收入으로서는 적지안흔 額數입니다 그런데 이 組合의 特異한 點은
一. 組合員에게 原料를 배급하고 그 製品은 等級을 査定하야 組合에서 買入하는 것
一. 組合員을 分業에 依하야 部分品을 만들게 됨으로 製品을 自由로 處分할수 업는것
一.製品의 約九割은 海外에 輸出하는 것임으로 不斷히 技術的으로 指導하고 또 製品檢査를 嚴格히하는 것
等입니다 그러고 또한가지는 組合에서 農園 七町步를 直營하야 優良農作物의 試作, 果樹栽培, 羊, 豚, 兎, 魚等의 飼養을하는데 그 主要한 趣旨는
一. 農業의 發達을 助長하고 組合員에게 農事知識을 가르키는것
一. 日後에 或 組合事業이 如意치 못하야 指導者들의 生活이 脅威되는때에는 農園에서 農事를지어서 生活하도록 하는것
等입니다 이 모든 制度의 創設과 販路의 開拓에는 相當히 苦心한 形跡이 보입니다 더욱이 三千餘戶의 組合員을 擁有하고 잇서 다만 製品의 工賃支拂로써 滿足치 아니하고 엇더케하면 組合員의 全生活을 指導하야 모다 更生되게할가 하는것이 組合의 最後目的이라고하니 今後에 또 엇더한 조흔 方案이 나올것을 一般이 期待하고 잇다고 합니다
 
自作農創定을 爲한 全面土地買收計劃

 
十月一日에 大邱를 떠나서 慶南으로 向하는길에 慶北에서 優良農村이라는 이름을듯는 慶山郡 押梁面을 잠간 보앗습니다 어느 洞里를 지내는데 路邊草幕에 農民三四人 이모여 앉엇습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어서 담배한대를 붓처물고 그들과 이약이를 始作하엿습니다 그 部落은 農事改良이라던가 弊風改善같은것은 相當히 잘된모양입니다 그러나 農家生活에 잇서서 가장 主要한 한가지가 아직 자리잡히지 못한것이 잇스니 그것은 卽小作條件의 調整問題문제입니다 그들의 말을드르면 이 地方은 全혀 小作農地帶인데 小作料는 間或 헐한것도 잇스나 大槪는 收穫의 六割 乃至 七割이되니 이와같은 高率의 小作料를 내고서는 아모리 주먹을 불끈쥐고 밤낮을 일하더라도 更生할 道理가 업다고 합니다 更生運動이 이러난 後에 面民의 生活이 從前에 比하야 多少 넉넉하여진것은 事實이나 今日以後는 이 以上더 向上될것같지안코 다만 自作農이 創定되던지 小作料가 내리든지 하는 外에는 다른길이 업다고합니다 여기서 한동안 이약이하다가 面事務所를 찾어갓습니다 이 面에서는 面長 朴炳采氏의 發案으로 「押梁面土地는 押梁面民에게로」라는 趣旨下에 土地買收資金을 造成中이라고 합니다 그 計劃의 大綱을 드르면 이 面內의 外地人土地가 約百萬圓에치가 잇는데 이 土地를 全部買收하기 爲하야 지금 資金을 造成한것이 約三萬圓이 된다고합니다 이 計劃을 얼는보면 鎻面主義 같기도하나 그 根本趣旨는 全面農民에게 自作地를 주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計劃은 今後實現與否는 別問題로하고 爲先 農民에게 土地를 주지안코는 更生될수업다는것을 가장 明確히 表現한 것입니다




面事務所마다 小作相談所



慶山을 떠나서 一路慶南으로 向하엿습니다 梁山에서부터 徒步를 始作하야 東萊와 釜山을거쳐 龜浦에서 洛東江橋를 건너 金海로 向하엿습니다 金海平野는 慶南有數한 沃野인데 今年에는 稻熱病이 甚하야 만흔 減收를 豫想하고잇습니다 稻熱病의 原因에 對하야 老農들의 말을드르면 氣候의 關係도 잇스나 大體로는 金肥를 만히쓴 까닭이라고 합니다 自作地같으면 自己의 計劃대로 肥料를 增感할수잇스나 이 地方은 大部分이 小作地라 肥料를 적게써서 이웃논보다 生育成績이 낫버지면 地主로부터 惰農한다는 말을 듯게됨으로 小作人들은 農事理致를 아지못하는 地主의 脾胃를 맞추기 爲하야 過量의 肥料를 쓰게되니 結局 小作人은 肥料와 收穫을 腹背로 損害보는 셈이라고 합니다
元來 慶南은 小作爭議가 만흔 地方임으로 當局에서는 이것을 未然에 防止하기 爲하야 面事務所마다 小作相談所를두고 或 地主와 小作人間에 紛爭이 生한 境遇에 小作委員會나 法廷에 提出되기 前에 먼저 그 地方事情을 잘아는 面當局이 居中調停하는 制度입니다 이 制度는 運用만 잘하면 地主와 小作人의 共榮과 協助精神을 培養함에 적지안흔 効果가 잇슬것입니다 나는 面事務所를 지낼때마다 大槪 찾어들어가서 小作相談에 對한 이약이를 드럿습니다 그 成績이 매우 良好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느 面의 面長은 이 制度의 運用에 對하야 여러가지로 걱정하는 이도 잇섯습니다 그의 말에 依하면
一. 小地主들은 面의 調停에 大槪 잘 應하고 잇스나 勢力잇는 大地主들은 面當局을 輕視하는 傾向이잇서 傲慢한 態度로써 調停에 잘 應치 안하고
一. 面長中에는 그 人格과 手腕이 地主의 敵手가 되지 못하야 도로혀 지주에게 利用되는일이 잇고
一. 엇던 面에서는 日後 面內의 寄附金募集같은때에 大地主로부터 多額의 寄附를 仰하기 爲하야 그 感情을 傷치 안흐려하고 小作人으로부터 小作相談잇는 境遇에 우물주물하야 結局 小作人을 屈從시키는 일이 잇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야 그는 조흔 制度도 조흔 運用이잇은 後에 비로소 그 機能을 發揮할수 잇다는것을 再三말하고 잇섯습니다
 
 
秋夕名節에 奉仕作業團活動 (1938. 43歲時)
舊曆 八月十五日 秋夕은 昌原道中에서 마지하엿습니다
男子는 술병을쥐고 婦人은 祭需를 이고 아해들은 새 衣服을입고 따라가는 家族省墓團이 끝침업시 오고가고합니다 나는 「去年秋夕은 漢陽城이러니 今年秋夕은 昌原路라」는 擬作古詩를 입속으로 외이면서 멀리 故鄕의 하눌을 바라보고 외로운 생각을 禁치 못하엿습니다
이 名節에 어듸를 가든지 만날사람도 업슬것임으로 하로를 閑靜히 쉬기로하고 「聖住寺」라는 名刹을 찾어갓습니다
절은 그다지 크지안흐나 퍽 종용하고 後面에는 竹林이 욱어지고 前面에는 맑은 시내가 흐릅니다 중한분은 親切하게 맞어서 山中所産의 밤을 내여놋코 優待하여줍니다 日氣가 淸明하고 따듯한으로 시냇가에나가 悠然히 앉어서 內服도빨고 양말도빨고 물소리와 새소리를 드르면서 無我境의 하로를 보내엿습니다
이튼날 舊 八月十六日인데 南鮮地方에서는 이날도 名節입니다 아침에 寺門을 나서니 一隊에 約三四十人식되는 二三隊의 群衆이 各其先頭에 奉仕作業團이라고 쓴 큰 旗를들고 山中을 向하야 드러옵니다 隊員들에게 물어보니 秋夕의 노는날을 利用하야 奉仕的으로 作業하는데 自己들은 꿀밤(도톨밤)을 주으러간다고 합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馬山方面으로 향하는데 거기에도 四五百名의 奉仕作業團이 道路를 修繕하고 잇습니다 노는날에 社會와 國家를 爲하야 奉仕的으로 作業하는 것이라던지 또 名節에 흔히 술울먹고 노는데 이런 作業을하면 돈도 節約되는 것이라던지 모다 當然히 할일이오 더욱이 奉仕觀念이 薄弱한 朝鮮農民에게는 이 奉仕의 精神을 너어주는것이 至極히 緊要한 일입니다 다만 한가지 생각할것은 作業의 種類와 方法입니다 團員들이 道路를 修繕하는것을보면 別로 修繕할것이업는 坦坦道路라 兩側에 흐터저잇는 잔돌몇個를 걷어드리고 삽과 괭이를 집고서서 閑談하는것이 卽 일이엿습니다 意義깊은 奉仕作業이 이와같이 眞實味가업고 한 形式에 흘러서야 될것입닛가 이런 作業을 식힐때에는 그 指導者들이 좀더 頭腦를 짜서 適宜한 作業方法을 硏究할 必要가 잇는듯 합니다
 


固城 朝日村에 集團自作農創設


馬山으로부터 咸安 晉州를 거처 固城을 왓습니다
여러곳의 優良更生部落을 보앗스나 元來 更生運動이란 巨大한 일이라 不過 五六年間에 조흔 成績이 날수 업는것이지만 이제까지의 運動은 너무 形式에 흘은 感이잇서 別로 신통한 成績이 나지못하고 잇습니다
固城郡에서는 참된 更生의 길은 오직 自作農을 創定함에잇다 하는 趣旨下에 巨流面 銀月里에 模範的으로 集團自作農 十五戶를 創定하고 名稱을 朝日村이라하고 爾來 三年間指導하여 오는 中입니다 每戶의 耕地面積은 一千六七百坪이 되는데 그 面積이 過少하고 또 每年 五十五圓 가량의 土地代金及 營農資金의 年賦金을 갚어가게되고 그 外에 每戶平均 百八十圓의 負債를 지고잇스니 이 小面積土地의 生産으로써 果然 이만한 負擔과 生活費를 지탱하여 나갈가는 큰 疑問이라하겟습니다 그럼으로 當局에서는 期於히 이 部落을 維持식히기 爲하야 堆肥原料及 燃料의 自給方策으로 共同採草地 一萬六千餘坪과 每戶에 林野一町二段 採草地六段餘를 設定하엿다고하니 이만한 施設을하여주면 이 部落은 僅僅히 유지하여 나갈것 같습니다
固城을 떠나서 泗川을 向하는데 어느 酒幕에 이르니 農民 五六人이 모여 앉어서 農事이약이를 하고읶읍니다 나도 마루에 올라앉어서 이약이에 한목 끼엿습니다 나는 어느部落을 구경하던지 그 部落 사람들의 말만 믿는것이 아닙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洞里事情을 率直하게 말할 理가업고 또 自己洞里의 缺點을 남에게 말하지도 안할것이오 또 나를 密酒製造의 調査나 畜牛生飼의 調査를 나온사람으로 녁이는 일이 잇기때문에 그 部落을 正面으로 드러가서 視察하여서는 實事情을 알기가 매우 困難합니다 그럼으로 먼저 다른곳에서 그 部落事情에 對한 槪念을 얻어가지고 部落을 視察한 後에 다시 다른곳에가서 視察結果를 討論하는 卽 三段視察法이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農民들에게 아무 意味업는듯이 朝日村 이약이를 끄내엿습니다 그들의 말에 依하면 「自作地面積이 너무 적어서 困難한 모양이나 自己土地를 所有하엿다는 반가운 생각에 勤勉하게 일을하며 또 當局으로부터 多額의 補助金과 林野採草地를 준다고하니 견듸여 나갈수 잇슬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같은 百姓인데 무슨까닭으로 朝日村사람에게만 積善을하고 우리에게는 아직 아무 消息이업는가」하고 여럿이 함께웃습니다 나는 이말가운데에는 어느農民에게든지 朝日村과 같은 施設을하여 달라는 切實한 要求가 들어잇다고 생각하엿습니다
 


五年間에 自作農增加 七十六戶


泗川을지내서 慶南唯一의 棉花王國이오 또 更生成績이 좃타는 統營郡 光道面 牛洞里를 찾엇습니다 좁고좁은 山谷을 이구비저구비 도라서 臥牛山밑에 이르니 이곳이 卽 牛洞이오 部落이 二三個所에 散在하야 앞에는 논과 棉田이 노여잇고 뒤에는 靑靑한 산이 둘려잇는데 먼저 눈에 뜨이는것이 돌입니다 밭에도 全部 자각돌 길에도 全部자각돌입니다 이 자각돌밭에서 무엇이 生産되느냐고 물엇드니 俗談에 「미영밭에 돌을던저라」는 말과같이 棉作地로서는 돌밭이 適當하다고합니다 部落복판을 지내서 이 洞里의 指導者 金甲謙氏를 찾엇습니다 氏는 親切하게 막어주어 時間이 가는줄도 모르고 이약이를 주고받고 하엿습니다 이 部落의 沿革으로 말하면 洞民은 主로 農業을 經營하여왓는데 營農法이 粗放하야 收入이적고 또 勤勞를 실혀하야 或은 도박으로 或은 酒色으로 昭和三年頃(1928)에는 祖先傳來하던 土地를 모다 歇價로 팔어버러고 洞民의 大部分이 貧農으로 떠러저서 春夏窮節에는 草根과 木皮로써 목숨을 이어가지 안하면 안될 慘境에 빠젓다고 합니다 이때에 金甲謙氏는 洞里의 將來를 걱정하야 有志二三人과 相謀하고 部落復興을 期함에는 爲先 이 洞里의 地質에맞고 가장 經濟的作物인 棉花를 積極栽培하는 以外에 他道가업다하야 棉花改良稧를 組織하고 郡面當局 周到한 指導下에 棉花栽培法의 改良에 努力하고 洞民이 또한 서로 協力하야 지금과 같은 조흔 成績을 얻엇는데 現在 稧圓數가 百三十七인이오 棉作段別이 三十一町이여서 每戶平均 約七百坪이오 每戶棉花販賣收入이 約 六十圓입니다 그러고 그間의 實蹟을보면
一. 昭和六年에 이 洞民全體의 負債額이 一萬圓이던것이 지금에는 千數百圓에 不過하고
一. 昭和八年에는 自作農이 九戶, 自作兼小作農이 六十一戶, 小作農이 七十二戶이던것이 지금에는 自作農이 八十五戶 自作兼小作農이 四十一戶, 小作農이 十九戶입니다
그런데 이部落耕地 全部가 田이 約四十町步, 畓이 約五十町步여서 每戶平均田畓이 一千八百餘坪에 不過하고 더욱이 昭和八九年頃까지도 大部分이 小作農 又는 自作兼小作農이엿는데 엇더케하야 能히 一家族의 生活을 維持하고 그남어지로 土地를 사고 負債를 갚엇슬가 나와 金甲謙氏의 問答은 主로 이 點에 잇섯습니다
牛洞에는 天惠가 매우 좃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그것을 利用할만한 精神이 업섯기때문에 全洞里가 한동안 極度의 疲弊에 빠젓지만 이 精神이 한번 更生됨으로부터 모든 天惠를 모조리 利用하게 된것이 經濟更生의 第一步를 進行한 始初이엿고 그처음 着手가 棉花栽培이엿습니다 金甲謙氏는 洞民의 更生意識을 喚起함에는 먼저 實物을 보여주는것이 急務라하야 苦心硏究한 結果 耕起, 施肥, 播種, 除草, 麥間作等에 獨特한 方法을 發見하야 一般으로는 一段步平均에 百七八十斤 生産되든것을 平均 二百六十斤으로 增殖식히고 棉作과 麥作을 連年 繼續的으로 間作하는데 亦是 獨特한 技術로써 一段步에 보리 三石식 生産하야 生活上 적지안흔 餘裕가 생겻습니다
또한가지는 洞里의 背後에잇는 廣大한 林野입니다 그 林野는 洞民에게 比較的 平均하게 分黨되고잇서 每戶에 一町步 乃至 五六町步가되는데 山林收入은 自家用 柴草를 대이고도 每戶平均 四十圓의 收入이 잇다고합니다 山林이 잇고보니 畜産도 相當하야 全洞에 牛가 百五十餘頭 山羊이 또한 百餘頭가잇서 洞民의 한 富源이 되고잇습니다 勿論 以前에도 이만한 富源이 업는것은 아니엿스나 그때에는 나무 한짐을 팔던지 소한마리를 팔던지하면 그것이 家用에 보태우지 못하고 全部 술값과 도박 資金으로 업서젓습니다 그러든것이 棉花栽培에 依하야 棉作과 麥作의 收入이 增加하야 朝夕걱정이 조곰 緩和되고 또 洞民의 更生意識이 確立되고보니 나무한짐을 팔아도 家用에 보태우고 길을가다가 소똥 한덩이가잇서도 논과 밭에 던저주고하야 생활이 점점넉넉하여 젓습니다 더욱이 從來에는 男子가 도박을하고 술울먹고 집에도라오면 婦人은 시장한 배를 움켜쥐고 앉엇고 아해들은 밥을달라고 울고잇서 집안이 殺風景이더니 農事에 힘을써서 부즈런이 일을하게된 뒤에는 男子가 밖으로부터 드러오면 婦人과 아해들이 반가운 얼골로써 對해주고 비록 반찬업는 보리밥일망정 그릇우에 수북하게 담겨서 집안에 和氣가 엉키우니 이에서 더한 趣味가 업섯다고 합니다
술맛과 도박맛만을 알든 그들은 半生동안에 일즉이 맛보지못하던 家庭味와 人生味를 맛보게되니 이때에 처음으로 勤勉과 着實이 우리 人間生活에 잇서서 얼마나 貴重한것임을 깨닷게되고 진작 精神을 차리지 못한것을 後悔하는 사람도 잇섯다고합니다 利用價値는 만흐되 賣買價格은 헐한 논밭을 每坪二三十錢으로사서 지금과 같이 만흔 自作農이 생겻다고 합니다
나는 金甲謙氏를 作別하고 洞口(동구)를 나오면서 다시 그 部落(부락)을 살펴보니 내가 過去 五六年間巡廻한 地方에도 이 洞里와같은 天惠를 가진곳이 적지안하엿습니다 그러되 牛洞과같은 更生을 한곳은 적엇습니다 여기서 다시금 指導者 한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것을 늣겻습니다
 


自作農王國의 南海島風景


統營으로부터 다시 泗川에 나왓다가 南鮮唯一의 自作農地帶라는 南海島로 드러갓습니다 徒步로서 南海風景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는데 갑자기 배가아푸고 嘔吐가납니다 或是食滯가 되엿는가하고 常備救急藥 주머니를 풀어서 몇個 먹엇스나 아무 効果가업고 다음에는 설사와 嘔吐가 連出하야 癨亂이 되엿습니다
이날은 마침 海風이 불어서 몸에 寒氣가 몹시듭니다 癨亂에 寒氣는 禁物이라 길녁에잇는 엇던 村家에 들어가서 잠간 房에들어가 調攝하기를 請하엿스나 누구집에서 病人을 조와할것입니가 一言下에 拒絶을 當하고 길가에 나와서 풀밭에 드러누엇습니다 癨亂은 如前히 계속되엿습니다 엇던 老人 한분이 지내가다가 나의 모양을보고 내곁에와서 근심하는 빛으로 직히고 잇섯습니다 이와같이 三四時間을 지내니 조곰 平復됨으로 艱辛히 二三里를 걸어서 어느 酒幕에 드러가서 쉬엿습니다 그날저녁과 아침을 굶은것은 勿論입니다 그 이튼날은 南海邑에 들어가서 하로를 靜養하엿습니다
南海島는 自作農이 全農家의 五割四分, 自作兼小作農이 二割八分을 占하고잇서 南鮮에서는 類例가업는 自作農王國입니다 무슨까닭으로 이곳에 自作農이 만흔가는 잘알수업스나 地方人의 말을드르면 人口에 比하야 耕地가 좁은 關係로 地價가 늘높아서 隣郡에서는 中畓一坪 時價가 一圓內外인데 이곳은 一圓六七十錢입니다 그래서 外來 資本家가 이섬의 土地에 投資하는者가 적고 또 이섬 사람은 勤勉하기로 有名하야 隣郡 農民들보다 倍以上의 能率을 내고 山腹에도 土質이 웬만한곳은 모다 논을 만들고 웬만한 논머리에는 모다 우물(井)을파서 灌漑에 쓰는等 土地에 對한 愛着이 몹시 强하야 生命으로써 祖先傳來의 土地를 직히려고 努力하는 것이 主要한 原因이라고 합니다
길을 걸어가는데 엇던 農民 한분이 내가 京城에 산다는 말을듣고 今年에 梔子값이 엇더냐고 뭇습니다 나는 主要農産物의 價格은 대강 알고잇지만 梔子값까지는 알수 업섯습니다 그 農民으로부터 자세한 이약이를 들어보니 이 地方에는 農家의 副業으로 梔子가 만히 生産되는데 主로 京城에가서 팔게되고 그 값의 騰落은 農家經濟에 影響이 크다고 합니다 또 이 地方에는 寸蟲藥에쓰는 枇子도 生産된다고 합니다
 


慶南을마치고 全南麗水에 上陸


十月十九日에 南海島에서 배를타고 麗水에 上陸하엿습니다 여기로부터 全羅南道입니다
麗水 栗村面을 걸어가는데 東便으로 眼界無際한 干拓地가 보입니다 논에서 일하는 農民에게 무르니 그것이 高瀨農場의 땅인데 三百町步나 된다고 합니다 그 農民의 말을드르면 干拓地가 開沓된 後에 從來에 耕地업든 農民들이 새로 耕地를 얻게되야 퍽 도움이되는데 今年은 農場과 小作人사이에 서로 利害가 맞지 안하야 小作人 六十餘人이 道, 郡, 及警察署에 陳靖하엿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內容을 드러보면 農場에 對한것도 잇스나 主로 農區長에 對한 條件입니다 農場側과 農區長의 말을 듣지못하고 小作人의 一便 말만으로서 그 眞否를 판단할수는 업스나 地主와 小作人이 서로 協助하야 共存共榮을 圖하고 나아가서는 生業報國을 하여야 될 이때에 互相間에 圓滿한 解決을 짓지못하고 畢竟 紛議를 生케 한다는것은 大農場으로서 매우 서트른 일이라고 생각 하엿읍니다
麗水地方은 人口가만코 耕地가 적어서 困難이 만습니다 그래서 山의 緩傾斜地를 開墾하려고 郡에 申請하는 사람이 만흔데 耕地問題方面으로보면 開墾하는것이 올흐나 林政方面으로보면 開墾을 許可할수 업게되는것이 今日의 現狀입니다 그래서 開墾申請한것의 却下된것이 今年中에 벌서 百餘件이 된다고합니다 農民들은 農民의 實情을 叅酌하야 農政과 林政의 調和를 圖하야 어느 程度의 開墾을 許하여 주엇스면 하는 要望이 적지 아니하엿습니다
 
農村指導者의 體驗談一節
全南에 접어들면서 優良農村으로 名聲이 높은것은 順天郡 外西面 錦城里오 그 中에서도 그 部落指導者 姜義淵氏의 名聲이 더욱 높앗습니다
내가 이 部落을 찾은것은 十月二十二日이엿습니다 이 部落은 元來 耕地가 좁고 農産物이 만치못한데다가 光州 筏橋間의 큰길이 이 部落앞을 通하여 잇슴으로 朝聚暮散之輩가 聯絡不絶하고 술과 도박이 盛行하야 子弟敎育같은것은 念頭에도두지안코 生活은 여지업시 破滅되엿으니 이것이 大正十一年頃(1922)의 狀態이엿습니다
그러든 것이 姜義淵氏의 故心慘憺한 指導에 依하야 지금은 完全히 更生되야 貯金이 一萬餘圓이오 從來의 傾頹하엿든 家屋을 改築한것이 三十五戶나 됩니다
이 部落의 更生基礎는 貯蓄에 잇섯습니다 집집마다 飯米貯蓄이잇고 農産物을 팔때에는 반듯이 貯蓄하여야합니다 그리하야 한동안은 貯蓄한 錢穀으로써 隣接한 二個郡 八個面 二十六個里에 貸付하야 殖利를 하엿습니다 이 殖利更生方法은 全鮮에 普遍的으로 適用할수업는 일이오 또 適用하여서는 안될 일이지만 이 部落事情으로보아서는 貯蓄을 獎勵하는 意味에서 不得已취한 方法이라고 합니다 나는 姜義淵氏를 만나지 못하엿습니다 이것이 한 遺憾입니다 다만 그 部落會館에서 얻어온 姜義淵氏 指導體驗談이라는 印刷物 一張이 잇기로 그 一節을 여기에 紹介합니다
「大正十五年에 金城靑年會라는 機關을 組織하여가지고 내가 靑年會長이라는 名目을 띄엿습니다 도박을 하는 者에 對하야 違約金 三圓식을 받기로하고 徹底的으로 禁止하엿스나 犯則者가 種種生합니다 제것가지고 제것먹고 제돈으로 제노름을 하는데 靑年會長에게 무슨 損害가잇스며 도박이 禁止된다고 利益될것이 무엇이냐하는 말로써 背後의 別別攻擊이 나에게 들려옵니다 이러케도 바눌로 찌르는듯한 攻擊을 받고나면 나도 凡人인 以上 엇지 心事가 平穩하겟습니가 그러할때에는 예-라 내것을 내가먹고 내가살면 그만이지 하는생각이 업지아니하엿습니다 그러다가도 나의 立志가 弱한것을 自責하면서 다시 나서서 밤마다 洞里로 暗行하야 各 舍廊房 輿論도듯고 或은 直接對面하야 議論도하는데 주먹 銃도 맞엇스며 物質上 生光업는 損害도 보앗스며 本性에업는 아양도 처가며 洞內 大小事를 勿論하고 甚至於 개싸움까지라도 叅見치 안할수업게 되엿습니다
昭和三年(1928)에 振興會를 組織하고 會內에 主婦部를두고 匙米貯蓄을 實行케하고 每月末에 主婦部委員이 取集하야 會館으로 가저오게하엿는데 그 成績이 좃치 못하엿습니다 나는 每月末에 貯蓄係員과같이 貯米袋를메고 戶別로 巡回하야 貯米를 달라고하면 主婦는 姑舍하고 主人되는 이부터 얼골을 찌푸리면서 貯蓄을 하엿다가 누구의 私腹을 채우려는가하고 主婦는 이달에는 貯米를 못하엿다 합니다 또 어떤집에가면 門도 열지안코 匙米代로 十錢乃至 二十錢을 네가먹어버려라 하는듯이 함부로 던저줍니다
이런 境遇를 當할때마다 나는 貯米袋를 땅에 집어던지고 千里萬里 다라날생각이 업지 아니하엿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꾹참고 다만 「將來를 바랍시다」하는 一言으로서 唯一한 勸誘의 標語를 삼엇습니다 이 洞民들이 貯米를 拒絶하는 心理를 캐여보면 二十餘年前에 洞里 共同財産이 不少하엿는데 그 主管者 몇사람이 消費하야 私腹을 채움일이 잇슴으로 모다 貯米를 실혀합니다 이에 나는 會議席上에서 나의 財産全部를 會員諸氏에게 擔保로 提供하겟스며 반다시 나의 實印을 使用을하야 通帳을 交付할 터이니 安心하고 貯蓄하야 將來를 바래자고 說明한後 貯蓄委員들로 하야곰 一層 努力케한 結果 今日과 같은 効果가 나타낫습니다」
한 部落을 建設하기 爲하야 온갓 侮辱과 惡評과 주먹을 받어가면서 十餘年間을 始終一貫한 姜義淵氏의 精神이 얼마나 거룩합니가
 
「時局에 鑑하야 地主小作地管理者에 望함」
順天으로부터 高興을 도라서 寶城에 드러왓습니다 全羅南道에서는 秋收期에 小作爭議가 이러날것을 念慮하야 「時局에 鑑하야 地主小作地管理者에 望함」이라는 小冊子와 「檢見小作料의 輕減 又는 免除及收納에 關하야 알어둘 事項」이라는 注意書를 一般地主及 各部落에 配布하엿습니다 그 內容을보면 地主의 理解를 求하고 小作人의 自覺을 喚起한 것이여서 地主와 小作人의 協助에 만흔 効果가 잇스리라고 생각하엿습니다 그 全文을 發表하기는 地面이 許치 안하고 또 農地令 解釋이 大部分임으로 여기에는 農地令 以外의 重要事項만을 쓰기로하겟습니다
「小作紛議의 發生原因을 보면 大部分은 地主 又는 小作地管理者의 不適法한 小作權移動에 基因하고 또는 檢見에 當하야 不相當한 高率小作料를 一方的으로 決定하며 或은 災害를 理由로하는 適法한 小作料減免 申請을 無故히 拒否함에서 生하는 것이다 그러고 小作權의 移動은 小作人의 生活을 根底로부터 威脅하고 甚한 者는 그 糧道를 끈코 小作人間에 小作權 爭奪의 策動을 誘發하고 延하야는 小作人相互間, 門族相互間, 部落民相互間의 相剋摩擦의 禍因을 作한다 또 小作地의 收穫高에 對하야 不相當한 高率小作料를 徵收함은 小作人의 努力에 報酬되는바가 적고 或은 取得이 皆無함으로 小作人은 農事에 熱心치안코 드듸어 土地를 荒廢케함에 이르나니 이와같이 小作人이 疲弊하는 곳에 地主만이 호을로 繁榮할수업는것이다 小作權의 不安과 高率小作料는 小作人 大衆의 生活을 不安케하고 生業報國의 決意를 遲鈍케 하는것이다」
하야 地主의 反省을 促하고 그다음에는
一. 地主가 貸付한 肥料代의 支拂을 遲滯한 境遇와 같은 것은 그것은 小作契約 自體에 對한 債務不履行으로 認定할수 업슴으로 그런 境遇에는 小作契約을 解除할수업다
一. 小作料額은 租收穫高의 五割以內로하고 水利組合 區內에 잇서서는 不得已한 組合區域에 限하야 當分租收穫高의 六割 以內로 할것이다
一. 小作人이 特別한 努力을 加하고 普通以上의 勞費를 投하야 增收 又는 改良된 收益의 大部分은 그것을 小作人의 取得으로하야 小作人의 努力에 報酬하야 써 小作人의 農事改良熱을 旺盛케하고 土地生産力을 增大시킬것이다
一. 小作料의 增額에 對하야 小作地가 地主의 特別한 施設에 依하야 增收된 境遇와, 大增收에 依하야 現小作料가 不相當하게 低廉한 境遇에는
適宜히 增額할수 잇스나 單히 地價가 騰貴하엿다던가 隣近의 小作料가 올랏다던가하는 事由만으로는 小作料增額의 理由가 되지 못한다
一. 地主가 小作人의 合意를 얻지안코 決定한 小作料額은 法律上 無效이다 地主와 小作人間에 小作料額에 對한 紛爭이 잇는 境遇에 收穫適期가 이르면 小作人은 地主 又는 代理人의 入會를 要求하야 그 收穫을 確認식히고 만일 地主側에서 入會치 안는때는 公務員과 같은 第三者의 入會를 求하야 收穫高를 立證하여 두어야 한다
道에서는 小作條件調停에 對하야 이와 같이 親切하고 周到한 方策을 쓰고 寶城郡같은 곳에서는 小作條件의 調停은 農地令의 趣旨를 徹底히 認識시킴에 잇다하야 郡面職員이 部落에 出張할때마다 그 趣旨를 宣傳하고 作春에는 直接 各部落에 出張하야 小作契約更新狀況을 調査하야 不當한 小作權移動을 防止하엿스며 아직도 地主와 小作人의 農地令의 趣旨를 諒得치 못하는 點이 만음으로 今後에는 조곰이라도 爭議의 徵兆가 잇는때는 곳 事件을 法에 呼訴하야 解決하도록하야 써 實地體驗에 依하야 農地令의 趣旨를 覺得케할 方針을 쓰고잇스니 이런것은 가장 民度와 時宜에 맞는 일입니다 다른道와 다른郡에서는 엇더한 方策을 쓰고잇는지 알수업스나 만일 全南과 같이 또 寶城과같이 徹底히한다면 朝鮮의 小作問題調停도 그다지 어려운일이 아니리라고 생각 하엿습니다
 


耕地調節로 一部落이 復興
寶城에 몇部落을 구경하고 長興을지나 康津郡 城田面 秀陽里를 찾엇습니다 이곳은 順天의 錦城里와 竝稱되는 優良部落입니다 이部落은 三十餘年前부터 沒落하기 始作하야 離散하는者가 續出하고 大正12年頃에는 部落總戶數 百四十四戶에 地主一戶, 自作農이 三戶, 自作兼小作農八戶,小作農이 六十戶, 被傭者가 三十五戶, 乞食者가 三十七戶라는 悲慘한 部落이여서 隣近에서는「乞人部落」이라고 불럿다고합니다 그러든것이 部落指導者 李永賛氏의 熱誠과 苦心에 依하야 지금은 모다 食糧이 充實하야 完全히 更生되고 地主二戶 自作農이 六戶라는 훌륭한 成績을 내고잇습니다
大體 이部落은 무엇으로써 更生되엿는가하면 勿論 다른 部落과같이 貯蓄, 農事改良, 消費節約같은것도 잇섯스나 그보다도 土地가업서서 農事를 짓지못하고 或은 土地가적어서 營農이 잘되지못하는 七十餘戶에 耕地를 준것입니다 이것이 有名한 耕地調節案입니다 朝鮮 어느農村을 보던지 한편에는 廣作하는 自作農과 및 小作地管理者나 地方有力者들은 或은 十餘町步 或은 二十餘町步를 머섬을드려서 耕作하는 者가 잇는데 한편에는 土地가적고 또 土地가업서서 營農치 못하는者가 잇스니 이 耕作權의 兼倂이 또한 農村의 큰 弊害입니다 李永賛氏는 部落內의 廣作者에 對하야 그 耕作地의 一部를 無作者 及 過少耕作者에게 分讓하기를 勸告하엿습니다 그 勸告要旨는
一. 部落內 志가함께 잘살기 爲하야는 불상한 無作者를 도아 주어야 되겟고
一. 廣作의 粗放農보다 一部分을 남에게 分讓하고 적은 面積으로 集約農을하는것이 有利하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自己가 耕作하는 土地를 누구가 남에게 分讓하려고 하겟습닛가 이 勸告는 結果가 좃치못하엿습니다 李永賛氏는 期於히 이 案을 貫徹하려고 決心하고 廣作者의 집에 每日 二三次 은 四五次식 찾어가서 自己일같이 哀乞하엿고 이 哀乞을 한동안 繼續하니 廣作者들도 그 誠意에 感動하야 畢竟 相當한 分讓을하기로 承諾하엿는데 오직 한사람이 承諾치 아니하엿다고 합니다 이사람은 部落內의 被傭者를 使用하야 大面積을 耕作하는 形便임으로 이 部落에서는 만일 그사람이 끗끗내 承諾치 안하면 그사람의 집일에는 雇傭되지 안할것과 其他 制裁條件을 協議하여가지고 最後로 勸告하엿드니 그사람도 部落公論의 歸趨를 斟酌하고 畢竟承諾하야 耕地調節案은 和氣裏에 圓滿히 解決되고 全部落民이 더욱 敦睦하게되엿스며 分讓을 받은사람이 三十戶인데 그들은 耕地를 얻은반가움에서 土地에 最大限度의 勞力과肥料를 드렷슴으로 生産은 前日의 倍에 達하엿다고 합니다 이 耕地調節案은 朝鮮農村의 現實에 빗치여보아서 가장 適切한 일이오 또 어느農村에든지 適用될수 잇는일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李永賛氏가 秀陽里를 更生식힌 功勞보다도 이 耕作調節案을 實踐을 通하야 一般에 보여준 功勞를 더 讚揚하기 싶습니다
이部落에서는 또 銀行으로부터 資金을 借入하야 田畓 一萬二千餘坪을 사서 無作及 過少耕作者에게 分配하야 그代金을 年賦로 償還케하고 李永賛氏는 自己所有畓 四千六百餘坪을 四人의 小作人에게 七年年賦로 分讓하엿습니다 그러고 이部落의 將來 施設計劃을보면
「農家의 生命은 耕地의 所有에 잇슴으로 全部落民에게 모다 自作地를 주도록 計劃進中이라」 합니다 이제까지의 經過로보아서 全部落自作農創定案은 決코 實現性업는 일이아니라고 믿엇습니다
 
第九信 (十一月一日)
羅州로부터 비를 맞으면서 南平에왓다가 光州에 잠간들리고 今日에 全北에 들어왓습니다
全北平野라고하면 朝鮮唯一의 大平野오 大農塲이 만키로도 朝鮮의 唯一입니다 따라서 小作問題가 가장 複雜하게 엉키여 잇는것도 또한 朝鮮의 唯一이겟습니다 그러나 全北平野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全北全體가 아니오 全州, 益山, 沃溝, 金堤, 扶安, 井邑의 六郡을 말하는 것이니 이 六郡이야말로 朝鮮의 小作條件調停의 如何를 左右할수잇는 主要地帶라고 볼수잇슬 것입니다 卽 이 六郡에서 地主와 小作人의 協助가 잘되고 모든 小作條件이 잘 調停된다면 他道는 大槪 이에 追隨하야 解決될수 잇슬것입니다 그럼으로 全北道에서는 小作紛議의 防止及 小作料減免에 關하야
一. 小作料額은 大體收量의 五割以內를 標準하고 收量增加에 伴하야 그 率을 遞減케하야 小作人의 勤勉心을 失치 안케할일
一. 小作人에게 金肥, 農糧, 耕牛等의 購入資金其他 營農資金을 貸付할 時는 그 利子를 低率로 하게할일
一. 小作에 關한 交涉은 團體的行動을 絶對로 避하게할일 等 要旨로써 農村의 明朗化를 圖하고 잇습니다
나는 지난 二十三日에 順天에서 家兒二人이 病에 걸려서 모다 危篤하다는 咸州家信을 받고 근심 中에 잇섯더니 今日午後에 裡里에 到着하니 郵便局留로 家親의 편지가왓는데 千萬意外로 「居二十三日午前六時, 重遠殞命,意外有如此之凶變,肝腸如裂,未知如何而敍懷」라는 凶報이며 世遠은 아직도 入院中이라고 하엿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나니 가슴이 터지는듯하고 집걱정이 머리를 눌러서 豫定한 巡回를 계속할수 업습니다 남은일을 大綱마치고 곳 歸社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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