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業朝鮮 本社特派員 韓長庚氏 通信 (抄)
農村指導者의 體驗談一節
全南에 접어들면서 優良農村으로 名聲이 높은것은 順天郡 外西面 錦城里오 그 中에서도 그 部落指導者 姜義淵氏의 名聲이 더욱 높앗습니다
내가 이 部落을 찾은것은 十月二十二日이엿습니다 이 部落은 元來 耕地가 좁고 農産物이 만치못한데다가 光州 筏橋間의 큰길이 이 部落앞을 通하여 잇슴으로 朝聚暮散之輩가 聯絡不絶하고 술과 도박이 盛行하야 子弟敎育같은것은 念頭에도두지안코 生活은 여지업시 破滅되엿으니 이것이 大正十一年頃(1922)의 狀態이엿습니다
그러든 것이 姜義淵氏의 故心慘憺한 指導에 依하야 지금은 完全히 更生되야 貯金이 一萬餘圓이오 從來의 傾頹하엿든 家屋을 改築한것이 三十五戶나 됩니다
이 部落의 更生基礎는 貯蓄에 잇섯습니다 집집마다 飯米貯蓄이잇고 農産物을 팔때에는 반듯이 貯蓄하여야합니다 그리하야 한동안은 貯蓄한 錢穀으로써 隣接한 二個郡 八個面 二十六個里에 貸付하야 殖利를 하엿습니다 이 殖利更生方法은 全鮮에 普遍的으로 適用할수업는 일이오 또 適用하여서는 안될 일이지만 이 部落事情으로보아서는 貯蓄을 獎勵하는 意味에서 不得已취한 方法이라고 합니다 나는 姜義淵氏를 만나지 못하엿습니다 이것이 한 遺憾입니다 다만 그 部落會館에서 얻어온 姜義淵氏 指導體驗談이라는 印刷物 一張이 잇기로 그 一節을 여기에 紹介합니다
「大正十五年에 金城靑年會라는 機關을 組織하여가지고 내가 靑年會長이라는 名目을 띄엿습니다 도박을 하는 者에 對하야 違約金 三圓식을 받기로하고 徹底的으로 禁止하엿스나 犯則者가 種種生합니다 제것가지고 제것먹고 제돈으로 제노름을 하는데 靑年會長에게 무슨 損害가잇스며 도박이 禁止된다고 利益될것이 무엇이냐하는 말로써 背後의 別別攻擊이 나에게 들려옵니다 이러케도 바눌로 찌르는듯한 攻擊을 받고나면 나도 凡人인 以上 엇지 心事가 平穩하겟습니가 그러할때에는 예-라 내것을 내가먹고 내가살면 그만이지 하는생각이 업지아니하엿습니다 그러다가도 나의 立志가 弱한것을 自責하면서 다시 나서서 밤마다 洞里로 暗行하야 各 舍廊房 輿論도듯고 或은 直接對面하야 議論도하는데 주먹 銃도 맞엇스며 物質上 生光업는 損害도 보앗스며 本性에업는 아양도 처가며 洞內 大小事를 勿論하고 甚至於 개싸움까지라도 叅見치 안할수업게 되엿습니다
昭和三年(1928)에 振興會를 組織하고 會內에 主婦部를두고 匙米貯蓄을 實行케하고 每月末에 主婦部委員이 取集하야 會館으로 가저오게하엿는데 그 成績이 좃치 못하엿습니다 나는 每月末에 貯蓄係員과같이 貯米袋를메고 戶別로 巡回하야 貯米를 달라고하면 主婦는 姑舍하고 主人되는 이부터 얼골을 찌푸리면서 貯蓄을 하엿다가 누구의 私腹을 채우려는가하고 主婦는 이달에는 貯米를 못하엿다 합니다 또 어떤집에가면 門도 열지안코 匙米代로 十錢乃至 二十錢을 네가먹어버려라 하는듯이 함부로 던저줍니다
이런 境遇를 當할때마다 나는 貯米袋를 땅에 집어던지고 千里萬里 다라날생각이 업지 아니하엿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꾹참고 다만 「將來를 바랍시다」하는 一言으로서 唯一한 勸誘의 標語를 삼엇습니다 이 洞民들이 貯米를 拒絶하는 心理를 캐여보면 二十餘年前에 洞里 共同財産이 不少하엿는데 그 主管者 몇사람이 消費하야 私腹을 채운일이 잇슴으로 모다 貯米를 실혀합니다 이에 나는 會議席上에서 나의 財産全部를 會員諸氏에게 擔保로 提供하겟스며 반다시 나의 實印을 使用을하야 通帳을 交付할 터이니 安心하고 貯蓄하야 將來를 바래자고 說明한後 貯蓄委員들로 하야곰 一層 努力케한 結果 今日과 같은 効果가 나타낫습니다」
한 部落을 建設하기 爲하야 온갓 侮辱과 惡評과 주먹을 받어가면서 十餘年間을 始終一貫한 姜義淵氏의 精神이 얼마나 거룩합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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